西の都 装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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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지쿠시노시·기야마초
지정 등 상황 국가 특별사적
엠블럼

663년 백제 전쟁 이후 오노성 유적과 같은 665년에 축성된 고대 산성입니다. 다자이후 정청의 정남쪽에 있는 보즈산(404m)에 있으며 오노성과 미즈키와 함께 백제계 도성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라시대에는 아내를 잃은 오토모노 다비토와 조문하러 온 관인들이 기이성에 올라 노래를 읊는 등 오래전 긴박했던 분위기와 달리 교류의 장이 되었습니다.

기이성 유적은 다자이후 남쪽에 위치한 기산과 그 동쪽 봉우리에 지어진 고대 산성으로 산기슭에 지어진 세키야 토루와 도레기 토루 등과 함께 ‘다자이후의 남쪽 수호’를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길이 약 4km의 토루를 성벽으로 하고 성문 유적과 수문 유적 외에 40채 정도의 초석 건물 터가 남아있습니다. 특히 남쪽에 있는 남수문은 고대 산성 중에서도 최대급의 크기를 자랑하는 통수구를 갖추고 있는데 그 옆에 3개의 작은 통수구도 발견되었습니다. 나라시대에는 많은 창고가 줄지어 세워져 기근과 재해를 대비해서 곡식을 비축하는 등 성의 역할도 변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으며 다자이후의 장관이었던 오토모노 다비토가 다자이후와 수도의 관인들과 초여름의 기이성에 올라 노래를 지어 나누는 등 문화 교류의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기이성의 출입구로서 토루에 설치된 문 터로 토루가 끊어진 장소에 문을 세우는 초석이 지금도 2개 남아 있습니다. 그 초석에는 문의 축을 끼우는 원형 구멍이 파져 있고 거기에서 추정해서 간격이 1.95m 정도의 좌우로 여닫는 문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북문은 기이성에서 현재 상정하고 있는 4개의 문 중에서 다자이후 정청 정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 길 중에 북쪽 멀리 오노성 유적(시오지산)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왕래하는 모습과 성내에 있던 창고들에서 물자를 나르는 사람들이 문 앞에서 문지기들에게 확인받는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지쿠시노시 캐릭터/
쓰쿠시짱

동북문은 지금 문의 초석만 남아 있지만 걸어가면 토루의 크기와 견고하게 지킨 성문의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현재 초석은 열화를 막기 위해 모래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기야마초 캐릭터/
기야만&기야마루

다자이후 유적의 정문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스자쿠대로의 연장선 상에 보이는 산이 기이 유적이 있는 기산입니다. 실제로 기산 정상까지 올라가면 지금은 많이 자란 나무로 인해 다자이후 유적은 보이지 않지만 북쪽으로는 하카타만과 후쿠오카평야, 남쪽으로는 지쿠고강과 지쿠시평야, 동쪽으로는 아사쿠라 지방까지 바라볼 수 있으며 그 풍경은 압권입니다. 기산 정상 부근에는 지역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기이성 유적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증거로 ‘덴지천황흠앙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기산잔디스키장:
우편번호 841-0204 사가현 미야키군 기야마초 미야우라 2166-1

JR 기야마역 에서 도보 약 1시간 20분

규슈자동차도 지쿠시노IC 에서 약 15분

고대 일본의 ‘니시노미야코’ イメージ画像

1300년 전 지쿠시 땅에 탄생한 ‘니시노미야코’. 동아시아에 꽃피운 장대한 국제 교류 도시의 스토리는 후쿠오카현 지쿠시노시·가스가시·오노조시·다자이후시·나카가와시·우미마치, 사가현 기야마초에 펼쳐져 있습니다.